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캔에 든 코코아를 샀을 때의 일이다.
그 코코아가 거창하게
'처음으로 남을 위해 산' 이라거나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산' 코코아 였다면,
아마 그 다음일이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 코코아는 가게에서 가장 많아 보였고, 비싸지 않은 편이었다.
문제는 코코아가 아니라 그 이후의 일이다.
뭐에 홀린 듯 코코아 캔을 끌어안고 방에 와서는
정수기에서 받은 뜨거운 물로 코코아를 연거푸 세잔이나 만들어 마셔버린 것이다.
정말 우습게도.
취해버렸다. 코코아 향을 지닌 검은 설탕에
1
그리고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책장에 기대었다.
그 때 발견했던건 아마 책이었을 것이다.
어릴적에나 한번쯤 읽어보았음직한 것으로 그리 두꺼운 편은 아니었다.
내용은 대충 마녀가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그래, 어렸을 적엔 전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마녀였다.
그 마녀가 쓰는 마법은 티비나 만화에서 봐왔던 것처럼
화려해보이지도, 강해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기껏 주문 비슷한걸 찾아보려고 해도,
마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마법을 걸어줄게.'
그리고는 오른 손의 검지손가락을 소년의 코 끝에 살짝 갖다 대었습니다.
정도였다.
물론 나도, 책속의 마법이 걸렸다는 소년도.
상당히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2
그 소년의 반응이 왠지 우스워서 책을 계속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마녀는 소년을 따라다니며 여행도 하고,
수상쩍은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며 일을 받기도 했었지.
결국 마녀와 소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났다.
3-1
소년은 자신의 마지막 생일에 마녀에게서 선물받았던 신발을 돌려주었습니다.
"이제 이 신발은 제게 맞지 않아요."
마녀는 신발을 받아 책장의 마지막 선반에 놓인 상자에 곱게 포장해 넣었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하죠?"
소년은 조금 추워보이는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글쎄, 그건 이미 알고 있지 않니?"
"..."
마녀는 책상 밑에서 잘 포장된 상자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상자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고 소년을 향해 빙긋이 웃어주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거니?"
"해가 뜨는 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큰 산을 넘어가면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물이 많이 고인 강이 나온대요.
그 지역 사람들은 그걸 '바다'라고 부른다더군요"
"아..."
마녀는 잠시 놀란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이건 가져갈 필요가 없겠구나."
"예, 그럴것 같아요."
소년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어느새 창 밖은 어슴푸레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법을 걸어줄까?"
소년은 발 옆에 놓인 짐을 가볍게 들어올렸습니다.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소년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마녀는 책상위에 놓인 상자를 정리하고 코코아를 두 잔 끓였습니다.
마녀는 두 손으로 컵을 받쳐들고 코코아를 마셨습니다.
맞은 편의 빈자리에 놓인 코코아는 공기 중에 김을 내고 있었습니다.
마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코코아를 마셨습니다.
자신의 코코아를 비운뒤엔
언제나처럼 싱크대 위에 잔을 올려두고 침대에 몸을 뉘였습니다.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마녀는 금세 잠이들었습니다.
3-2
4
책장을 넘기며 예전에 읽었던 내용들을 새롭게 기억해 내고있을 때
어쩐지 손에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은 앞장보다 조금 두꺼운 검은 종이였다.
동시에 그것은 어릴적 기억으로 내가 알고있던 책의 끝이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그 검은 속지를 넘기고 나니
그 뒷부분에는 책의 앞부분에 쓰였던 글자의 반쯤되는 크기로 글이 적혀있었다.
나는 내가 어릴적에 놓친 책의 결말이 궁금해 곧장 뒷부분을 읽어나갔다.
내용은 마녀가 소년을 만나기 이전으로 성에서 살때의 이야기였다.
성에 살던 그녀가 마을로의 외출이 뜸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마을에 퍼진 괴상한 소문때문에 그녀가 마녀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었다.
마을에 퍼졌던 소문은 마녀가 그녀의 성 지하에 한 남자를 가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느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밤. 사람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가졌고
다음날 성에 찾아가 보니 성에는 마녀도 남자도 없어
모두가 의아해 했다는 식으로 책은 마지막장에 다다랐다.
그날밤도 어김없이 마녀는 촛대를 들고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그날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유난히 차갑고 깊게 느껴졌습니다.
마녀가 도착해 촛불을 비춘 감옥에는 지푸라기 몇싸락이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감옥에서 작은 기침소리가 났습니다.
마녀가 감옥에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제서야
한 남자가 마녀에게 등을 돌린채 벽을 향해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마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5-1
마녀는 살짝 입을 벌렸습니다.
감옥의 냉기가 마녀의 숨을 얼려 연기로 사그라들게 만들었습니다.
마녀는 나즈막히 말했습니다.
"미안.
바다..
바다에 가자.."
".."
남자는 이제 마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 너무 힘들어. 내가 왜 여기서 나가야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마녀는 촛대를 감옥 앞에 세워두고
남자를 향해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죽여줘"
5-2
남자는 덤덤히 말했습니다.
"지금은 갈 수 없어"
"그럼. 나중에
바다에 가자..
거긴 사람도 별로 없을거야.
이제 곧 겨울이니까..
그럼 꼭 나랑.
둘이서 바다에 가자.
운이 좋으면 바다가 비맞는 소릴 들을 수도 있을거야..."
감옥을 울리는 마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습니다.
어느새 사라진 마녀의 목소리 대신
마녀의 흐느낌이 성의 지하를 채워나갔습니다.
마녀는 처음으로 남자를 가둔것을 후회하였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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